 |  | | ↑↑ 김명호
-전)한국공공정책평가협회 지방자치단체 재정 평가위원
-전)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근무 | ⓒ 경서신문 | 430여 년 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성주지역 의병활동 상황을 재조명한 '성주임진의병예술제'가 지난달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 '성주의병창의마을'인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도남재(道南齋) 일대에서 열렸다.
3년 전 성주임진의병정신문화보존회 주최 '성주임진의병축제'로 시작된 이 행사는 성주지역은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의병 후손들이 주인공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성주지역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과 맞서 싸운 우리 선조들의 의병정신을 재조명하고,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후손들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열리고 있는 이 행사에 첫해부터 참여하며 임진왜란에 대해 다시금 뒤돌아보는 계가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관군들이 패하거나 도망친 자리에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이 왜적들과 맞서 관군을 대신해 싸워서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했다는 아주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관련 자료를 찾아서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은 놀랍게도 내 고향 성주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점령한 다른 지역들과 달리 당시 백성들 가운데 일본군과 내통하며 은밀히 관군의 허실과 지세 등을 알려주면서 왜군들을 경내로 불러들인 세력들이 있었고, 여기에 성주 백성들의 절반은 일본군을 신 상전(新上典)이라 부르며 해방군으로 맞이했다는 점이다.
|  | | ↑↑ 성주의병창의마을인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도남재에서 의병창의에 함께 했던 36위를 기리는 숭모행사인 '경모제(景慕祭)'가 진행됐다. | ⓒ 경서신문 | | 성주에는 임진(1592)년 4월 23일 처음으로 왜군들이 들어왔다. 사나흘 후 27일에 관군들과 목사와 판관까지 도망쳐서 비어 있던 성주 성을 차지한 왜군들은 자신들과 내통하던 적산사 주지승 찬희를 목사로 삼아서 관곡을 나누어주며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이 때 성주 백성들의 절반이 다투어 달려 나와서 곡식을 받고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면서 “새 주인(新上典)이 나를 살렸다”고 오희문은 자신의 일기 쇄미록에 기록했다.
성주지역에서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사족 양반들은 왜군들과 분노한 백성들의 공격을 피해 목숨을 건 도피를 해야만 했다. 당시 벽진 운정리 개터마을 출신 사족 도세순의 용사일기에 따르면 왜군들이 4월 27일 성주 성을 점령한 후 읍내 인근 마을들을 방화한 탓으로 “화염이 성안에 가득했고 불빛이 하늘까지 다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튿날인 4월 28일 아침에도 방화로 인한 불길이 사방에서 솟구쳤고, 연기가 하늘에 가득하여, 대낮에도 바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 “모두 공포에 질렸고” 어떻게 할지 몰라 “쥐들처럼 숲속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고 했다.
피난을 떠날 형편이 못되었던 낮은 신분의 백성들은 피난을 떠난 사족 양반들의 빈 집을 습격, 약탈, 방화 등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특히 성주 지역 백성들이 왜군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주 관군들도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저하되어 일본군들이 성주에 당도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쳐 궤산되었으며, 목사와 판관까지도 도망친 상태에서 일본군이 성주 성을 차지 한 것이다.
왜군들의 성주읍 침탈은 4월 13일 부산진에서 진격을 시작한지 불과 열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지만 왜군들이 성주 경내를 쳐 들어오기도 전에 성주 관군 5,000명 가량은 경상감사 김수의 명령으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대구로 가던 중 4월 18일에 현풍에서 모두 도망쳐 궤산해 버렸다.
이렇게 관군이 궤산되어 성을 지킬 군사들이 없어진 성주의 사정을 왜군들에게 낱낱이 알려주는 성주에 거주하는 첩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쉽게 성주 경내로 진입하였고 성주 목사와 판관도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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