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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시씨(浙江施氏) 관향(貫鄕)의 유래
경서신문 기자 / 입력 : 2024년 10월 08일(화)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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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8일부터 '성주임진의병예술제' 의병정신 재조명 애국애족 정신 계승
"마땅히 목숨을 걸고 싸워 죽을 것이니,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430여 년 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성주지역 의병활동 상황을 재조명한 '성주임진의병예술제'가 오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 '성주의병창의마을'인 대가면 도남리 도남재(道南齋) 일대에서 열린다. 3년 전 성주임진의병 정신문화보존회 주최 '성주임진의병축제'로 시작된 이 행사는 올해 성주 임진의병장이었던 서암공 배덕문 선생과 서강 배설 장군을 비롯 의병창의에 함께 했던 36위를 기리는 숭모행사인 '경모제(景慕祭)'와 임진의병 창의를 기리는 '예술제'로 구성하여 '성주임진의병 예술제'란 명칭아래 성주지역 주민들은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의병 후손들이 주인공이다. '성주의병 창의마을'인 대가면 도남리 '도남재' 일대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경상우수사를 지낸 배설 장군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임진왜란 당시 성주지역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과 맞서 싸운 우리 선조들의 의병정신을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후손들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번 행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성주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36위의 선조 위패를, 그 문중의 후손 대표들이 모시고 제사드리는 '제3회 임진의병기림경모제’를 준비하고 있는 시국종 사무국장을 만나 절강시씨(浙江施氏) 관향(貫鄕)의 유래에 대해 들어본다.
|  | | ↑↑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 뒷산에 위치한 절강 시문용의 묘(浙江施文用之墓) | ⓒ 경서신문 | |
|  | | ↑↑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에 1935년 순조 35년에 세워 진 절강 시문용(浙江施文用)의 유허비(遺墟碑) | ⓒ 경서신문 | | 시조(始祖) 시문용(施文用)은?
시씨(施氏) 는 본래 중국 오흥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나라 경왕(敬王:제26대 임금, 재위기간: BC 519∼476) 때 성유(聖儒)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시지상(施之常)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절강시씨(浙江施氏)의 시조(始祖) 시문용(施文用, 1572∼1643)은 중국 절강성 포강(浦江)에서 태어난 명나라 사람이다. 병부시랑을 지낸 시윤제의 아들 시문용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했던 마귀(麻貴) 제독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참전했던 무장(武將)이다. 중국 절강 출신이어서 후손들이 절강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는 정유년 6월 절강병 1천명을 거느리고 마귀(麻貴)제독과 함께 이 땅에 나왔다. 이해 여름 일본군 10만여 명이 북진할 때 남원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군 3천명과 조선군과 백성을 몰살시키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점령 후 경기도 접경 직산(稷山)에 일본군(6~10만 추정)이 집결, 9월초 한양을 향해 진격할 때 순수 명군의 힘으로 이를 격파하자 일본군이 남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 시문용도 참전했고 12월 명나라 군이 총동원되고 조선군이 합세하여 울산성을 공격할 때 참전했다. 이듬해 1월 명나라에서 유격장군 람방위(藍芳威)가 3천300명의 절강성 군사를 거느리고 추가로 나오자 이때부터 시문용은 이 부대의 유격중군장(遊擊中軍將, 行營中軍)이 되어 실질적으로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당시 이 부대가 공주 공산성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막아주어 민폐가 없었다며 후일에 세워 준 송덕비가 지금 공산성에 있다. 시문용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철군 할 때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 3천명을 모집, 일본군과 싸워 선조로부터 의병도대장의 직책을 받았고 집에 앉아 영의정을 지냈다는 정인홍이 시문용은 문장과 무예에도 뛰어나고 천문, 지리, 의술 등등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이런 사람은 만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고 이런 분이 조선에 꼭 필요하다며 간곡히 권유하여 이 땅에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1601년 정인홍의 도움으로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현재 수륜면 보월리)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창녕장씨를 부인으로 맞아 영건, 영달 등 두 아들을 낳았다. 그 후손이 오늘의 절강시씨를 이루게 되었다. 선조 35년에 중추부사의 벼슬을 받았고 광해군 7년 10월5일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정식 왕실풍수가 되어 지금은 없는 인경궁과 5대궁의 하나로 서울에 남아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터를 잡고 지었으며 제도 개혁 등을 하여 몇 년 사이에 한양을 전쟁이전 보다 활발한 한양으로 만들었으나 인조반정 때 정인용이 실각되자 성주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력했다. 명과 청이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격돌하던 1630년대 조선은 친명배청의 노선을 견지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략했다. 이것이 병자호란 (1637년. 인조 14년)이다. 다음에 1월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린다. 이때 청 태종은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해 청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겉으로는 이 요구를 수락했으나 내면으로는 명의 많은 유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당시 시문용이 피신한 곳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 기슭이다. 문용은 군성산 기슭에 은거하며 대명단(大明壇)을 쌓고 청나라에 망한 무국 명나라의 재기를 기원했으나, 1644년 명은 청의 힘 앞에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조국의 중흥을 기원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형곡동에 자리잡고 여생을 보낸 후 1643년 72세로 형곡동에서 별세, 형곡마을 뒷산, 지금의 묘지에 영면에 들었다. 예를 올렸던 대명단(大明壇)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가로 4m, 세로 3m, 높이 1m 쯤 되는 돌로 쌓은 제단이다. 시문용의 후손들은 매년 세 차례씩 이 제단 앞에서 북망사배의 예를 올린다. 그로부터 약 1백여 년 동안 그의 후손들은 나라 잃은 설움 속에 인고와 수모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임진왜란 참전 용사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신변을 보호해 주었던 조정의 관심도 세월이 흐를수록 엷어져 갔다. 조선 조정이 시문용의 후손들을 비롯한 명의 유민들에게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명나라 유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조사해 왕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뒤늦게나마 시문용에게 병조참판직을 추증한다. 그의 후손들은 일체의 조세와 부역을 면한다는 교지도 함께 내렸다. 이때부터 시씨 문중에서는 지방관서의 말단 벼슬이나마 차지하는 인물이 가끔 나타났다. 그러나 워낙 인구가 적은 데다 첩첩 산중에 숨어 살아야 했기에 당상관급의 벼슬을 기대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했던 36년 동안 절강시씨는 또 다른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의 후예들에게 항상 질시와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가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조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유정(有鼎)과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유영(有榮)이 유명했으며, 한익(漢翼)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올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치황(致璜)·정석(廷錫)·영석(暎錫)·민식(敏植)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쳐 절강시씨를 더욱 빛냈다.
|  | | ↑↑ 달마다 초하루 보름이면 북쪽 명나라을 향해 절을 한 대명단 제단. | ⓒ 경서신문 | | 성주에도 대명동이 있다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문명2리)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정착한 명나라 장수 서학과 그의 후손들 절강 서씨의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지로는 대명단, 풍천재, 서학 장군 묘가 있는데 이 장소들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 대명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정착한 명나라 장수가 두 명이었는데 절강 시씨인 시문용, 한 명은 절강 서씨 서학이다. 절강은 중국 저장(浙江)성을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것이다. 현재 용암면 문명2리에 속하는 이 마을은 명나라 출신인 이들이 고국을 기리기 위해 명나라를 따서 마을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지은 것이다. 대구 남구에 위치한 대명동 역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다가 조선에 정착하고 귀화한 풍수가인 두사충이 명나라를 기리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지은 것이 유래이며 성주의 대명마을과 유래가 비슷하다.(성주의 대명마을 역시 표지판에는 대명동이라고 적혀 있으며 주민들도 대명동이라고 칭하는 편이다). 풍천재는 서학과 시문용 두 장수를 추모하기 위해 1834년(순조 34) 유림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나름 관리를 해왔는지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풍천재 주변에는 배롱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세 그루 심어져 있고 대나무숲이 있다.
|  | | ↑↑ 풍천재는 중국 명나라 절강성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파병되었다가 귀화한 서학과 시문용을 추모하여 1834년(순조 34) 사림에서 건립한 재실이다. | ⓒ 경서신문 | | 문화재 등재 시급
풍천재 옆에는 서학과 시문용의 유허비가 있는데 이 비석들은 풍천재가 세워진 이듬해 1835년(헌종 1) 세워졌다. 서학 장군과 시문용 장군이 마을 뒤쪽 산에 매달 초하루에 고국 명나라를 향해 사배를 올리는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이 대명단이다. 한자로 대명단(大明壇) 자가 꽤나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서학의 후손들인 절강 서씨는 여전히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지만 함께 살던 절강 시씨들은 현재 마을에 남아 있지 않은데 절강 시씨들은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맏질마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마을로 거주지를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대명마을에는 절강 서씨만이 거주하고 있다. 유적들이 대체로 흔적도 잘 남아 있는 편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특색도 갖춘 편이지만 아직도 사적은 커녕 도기념물이나 유형문화재 정도에도 등재되지 못한 것이 뜻밖이다. 성주군에서도 이를 의식하고 대명단과 풍천재를 문화재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듯하며 향후 성과에 따라 이 유적들도 중요성을 인정받아 존재가 제대로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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